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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어느 막바지 토요일에 용유지를 갔다가 오면서 김정희 선생 고택이라는 이정표가 보여 가 본 곳입니다. 큰 도로에서 들어서 들어 가는 진입로는 봄에 드라이브하기에 딱 좋은 환경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김정희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라고 합니다.  김정희 선생의 증조부인 김한신이 영조대왕의 사위가 되면서 예산과 서울에 저택을 하사받았다고 합니다. 이곳은 조상을 모시고 독서를 하기 위해 즐겨 찾던 곳이라고 합니다. 


추사 김정희는 글과 금림 글씨가 독창적이며 이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학자이며 예술가라고 하네요. 55세 때인 헌종 6년에 정쟁에 휘말려 제주도에 약 9년간 유배되었는데, 이 시기에 추사체라는 독창적인 글씨체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헌종은 유배 중에도 김정희의 글씨를 요구했다고 하네요.


고택일대는 김정희가 나고 자란 고택과 그가 묻힌 무덤, 증조부 김한신의 묘와 증조모 한순옹주의 열녀문, 김정희가 청나라에서 가져온 백송, 그가 수도하던 화암사 등의 유적이 있다고 합니다.


입구에 있는 글귀와 세한도가 보입니다. 세한도는 조선 말기의 사대부 서화가 완당 김정희가 1844년 제주도 유배지에서 수묵으로만 간략하게 그린 사의체의 문인화이다. 1840년 윤상도사건에 연루되어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귀양 온 김정희에게 사제간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두 차례나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을 구해다 준 역관인 우선 이상적의 인품을 날씨가 추워진 뒤에 제일 늦게 낙엽지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지조에 비유하여 그려 준 것이라고 합니다. (위키백과)


고택으로 들어서는 대문입니다.


고택의 건물 내부를 찍은 사진들이에요.


추사의 꽃이라고 하는 수선화를 여기 저기 심어 놓았습니다.  추사 이전에는 수선화에 대한 그림이 거의 없다가 추사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추사의 유배지였던 대정읍 일대에 유독 수선화가 많았다고 합니다. 주민들은 그저 잡초로 여겼는데, 추사가 수선화를 세상에 알렸다고 하네요.

추사는 칠언시 ‘연전금화(年前禁花)’에서 ‘멍청한 사내놈들 신산(神山, 한라산)까지 못 갔던지 곧고도 미끈한 게 예 알던 모습일세 세상 모든 하늘 꽃은 물들지 않지마는 세상에 내려와서 온갖 설움 겪었구나 몇 해 전에 수선화를 캐내라고 하였다’라는 시를 남겼습니다.


고택의 내부는 문을 들어 서면 사랑채가 보이고 그 뒤로 안채가 보입니다.


입구쪽에서 사랑채와 안채를 찍어 보았습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든 생각이 이런 곳에서 살면 좋겠다였습니다.


담장까지 가서 전체 건물을 찍어 보았습니다.


사랑채의 모습입니다.


안채의 모습입니다.


안채로 들어 서는 문입니다.


안채를 찍어 보았습니다. 폐쇄된 조선시대의 여성들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깥으로 나오면서 찍은 대문입니다.


좌측으로 돌아 가면 우물이 나오고 관리건물이 나오고 추사 김정희의 묘가 나옵니다.









묘를 끼고 산쪽으로 산책로가 나 있어서 산책을 할 수 있구요, 월성위 김한산의 묘를 거쳐 조선 왕실에서 유일하게 열녀가 되신 화순옹주홍문을 볼 수 있습니다.


월성위 김한신의 묘입니다.


멀리서 담은 묘와 열녀문 사진입니다.


화순옹주 홍문입니다.


문으로 가까이 가면 열녀문이 보입니다.



조금 더 가까이 가면 글씨들이 보이네요.


내부 모습인데요, 건물을 떠 받치던 돌들 만이 남아 있네요.


김정희가 청나라에서 가져온 백송이라고 합니다.


백송 옆에 있는 노송도 멋지네요. 그래서 한 장 찍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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